문화관광 아이콘 문화유적

  • 메인으로 이동하기 버튼
  • 문화관광
  • 문화재 /명소
  • 문화유적
  • 인물별

서동일 (徐東日, 1893. 12. 25~1966. 4. 26)

서동일 기념비 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23년 1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남형우(南亨祐), 배천택(裵天澤) 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국민당(國民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재정부장(財政部長)에 취임하였다.
1924년 1월 국민당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경북 대구(大邱) 일대에서 군자금 1,300여원을 모집하여 같은 해 2월경 북경에 전달하고, 1925년 1월에 재차 남형우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4월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지침으로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다가 1925년 10월경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6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공갈죄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영 (吳哉泳, 1897. 5. 24~1948. 8. 30)

오재영 기념비 부산(釜山)사람이다. 1920년 9월 의열단원인 박재혁(朴載赫)이 상해에서 장기(長崎)를 거쳐 부산에 입향하여 자기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중국서적상으로 가장하고 부산경찰서장을 방문하여 폭탄을 투척, 서장이 중상을 당한 거사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박재혁이 국외에서 숨겨가지고 온 폭탄 한 개를 맡아 두었다가 1920년 9월14일 거사를 결행하는 박재혁에게 내주는 등 박재혁의 의거를 돕다가 공동혐의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1921년 8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규 (金貞奎, 1883. 6.10~1960. 9.14 )

김정규 기념비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3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북장로파 계열의 영국인 목사 박걸(朴傑)이 혼춘(琿春)지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박태항(朴兌恒)·한수현(韓秀鉉)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혼춘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서 주동자인 황병길(黃炳吉)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 군중 800여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회장인 문창범(文昌範)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때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高日燮)·안태국(安泰國)·김한익(金漢益) 등과 함께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유상규 (劉相奎, 1897. 11. 10 ~ 1936. 7. 18)

유상규 기념비 평북 강계(江界) 사람이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국내에 있는 유력재산가, 학교 및 종교계 등을 조사하여 독립운동의 자료로 삼기 위해 조직한 임정조사원의 평북 강계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2월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이던 안창호(安昌浩)의 비서로 활약하였고, 동년 2월 22일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내에서 흥사단(興士團) 원동지부(遠東支部)에 가입하였고, 유기준(劉基俊)을 흥사단에 가입시키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25년 12월부터 1931년 2월 22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안창호의 주창에 의해 조직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활동하였으며, 1931년 하계 수양대회를 개최할 때 김윤경(金允經), 김 선량(金善亮) 등과 함께 동우회 강령의 선전방안과 장래를 위하여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개척군(靑年開拓軍)의 조직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명훤 (文明煊, 1892. 11. 30~1958. 10. 23)

문명훤 기념비 평남 평양(平壤)사람이다. 국권이 침탈되자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 방략을 모색하다가 병을 얻어 귀국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맹산(孟山)에서 시위를 주동한 후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영어전문학교를 수료하고 192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의 서기로 임명되었다가 동년 6월 24일 의원 사직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하였다.
1931년 초에 귀국하여 상업에 종사하면서 흥사단의 국내 조직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1937년 6월 회원 15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일경의 고문을 견디며 4년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41년 7월 21일 무죄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일평 ( 文一平, 1888. 5. 15 ~ 1939. 4. 3 )

문일평 인물 평북 의주(義州)사람이다. 1905년 도일하여 청산학원(靑山學院) 중학부와 정칙학교(正則學校)를 거쳐 동년 가을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입학, 1908년 졸업한 그는 이 시기 관서(關西) 출신 유학생들의 자강운동단체였던 태극학회(太極學會)에 평의원과 총무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학회 기관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 편찬원으로도 참여하여 국민주권론과 국가독립론에 관한 계몽적인 논설들을 기고하였다.
1908년 귀국 후 약 3년 동안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의주 양실학교(養實學校),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 등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 출입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토요강습소의 교사로 일하면서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한 국권이 침탈되자,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를 포기한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1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예과를 수료한 뒤 정치학부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강하였으며, 유학생친목회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담당하여 창간호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2년 국권 회복에 투신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한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상해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서 일본글 번역을 담당하면서 동년 5월, 신규식,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明熹),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아시아 각 민족, 특히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혁명당 영수 진기미(陳其美), 청년회교관인 고유균(顧維鈞)등과 교류하는 한편, 동제사에서 설립한 박달학원(博達學院)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1918년경 귀국하여 1919년 3월 12일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애원서(哀願書)」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동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 중앙고보, 송도고, 배재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연구에 전념하게 된 그는 1923년 「동명」이라는 잡지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이라는 논설을 기고하는 등 역사관을 정립하였고, 1925년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문일평 기념비 도일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귀국한 그는 1927년 2월 「중외일보(中外日報)」기자 자격으로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간사를 맡아 통일전선의 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8월에는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이사 및 기관지인 「자활(自活)」의 주필로 선임되어 민족자본 육성 활동과 그에 관한 계몽의식을 고취시켰다.
1933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활동한 그는 사론과 논설을 정력적으로 집필하면서 이 때부터 역사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을 전후하여 본격화하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에 참여하여 국학 진흥에도 힘을 쏟았으며, 1934년 5월 창립된 진단학회(震檀學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문헌고증 사학적 방법론의 도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27년부터 1939년 사이 발표된 100 여 편의 글 가운데 90% 이상이 이 시기에 집필된 대중적인 역사관계 글들이었고, 많은 대중강연을 통하여 한국사의 대중화와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가 1939년 4월 서거하였다. 그의 사후 1939~40년경 조선일보사에서는 고인의 글을 묶어 『호암사화집』,『호암전집』,『소년역사독본』 등으로 출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세창 (吳世昌, 1864. 7. 15 ~ 1953. 4. 16 )

오세창 인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23세의 약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박문국 주사(博文局主事)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기관인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가 되어 문필로써 명성을 떨쳤다.
1894년(고종 31)에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낭청, 총재비서관(郎廳, 總裁秘書官)이 되었다가 농상공부 참의(農商工部參議), 우정국 통신국장(郵政局通信局長)을 역임했다. 1902년(광무6) 개화당(開化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그 곳에서 손병희(孫秉熙), 양한묵(梁漢默)등을 만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하여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사(大韓民報社)를 창설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하여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崔隣), 권동진(權東鎭)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하였다. 이에 2월 10일경 최린과 최남선(崔南善)이 협의 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였으며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과 이를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하였다.
2월 25일에는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道師)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홍병기(洪秉箕), 교도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李鍾一)을 동지로 끌어 들였다. 그는 2월 27일 그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보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시청총감부(警視廳摠監部)에 구금되었다가,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운동자들과 극비리에 연락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의원 의원(民主議院議員)을 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장(大韓獨立促成國民會長)과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全國愛國團體總聯合會) 회장을 맡아보며 독립국가 건설에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운 ( 韓龍雲, 1879. 7. 12 ~ 1944. 5. 8 )

한용운 인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며 불교인(佛敎人)이다. 처음에는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갔다. 한때 만주 간도성(滿洲間島省)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광무 9)에 인제(麟蹄)의 백담사(白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후 출가 입산하여 백담사에 오는 애국지사에게 조국 없는 백성의 비애와 앞날의 광복운동에 대한 방책을 설득시켰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의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는데 힘썼고,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또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해인사(海印寺)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한용운 기념비 그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했으나, 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여기에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첨가하여 더욱 그 결의와 의미를 강하게 하였다. 27일에는 다시 최린을 방문하여 스스로 민족대표자로 서명ㆍ날인하고, 백용성으로부터 위임받은 도장으로 서명ㆍ날인하여 주었다. 이튿날인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서에 따른 제반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임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고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병호 ( 徐丙浩, 1885. 7. 7 ~ 1972. 6. 7 )

서병호 기념비 황해도 장연(長淵)사람이다. 1914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금능대학에 유학하였다. 1919년 초에 그는 신규식(申奎植), 김규식(金奎植) , 여운형(呂運亨),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장덕수(張德秀), 조동우(趙東祐) 등과 함께 상해 영국 조계(租界)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추진할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기관지「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간하여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신한청년당은 그 결성과 함께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파견하여 대외적으로 민족대표기관의 임무를 실행하였으며, 동시에 국내 및 노령(露領), 일본 등 각지 동포사회에도 세계 대세에 따르는 독립운동을 펴게 하기 위하여 당의 중요인물들을 파견하였다. 김규식(金奎植)의 상해 출발 직후인 2월 초에 그는 선우혁(鮮于爀)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전개 및 자금 갹출과 시위계획을 추진하도록 하여 3, 1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한 후 상해로 귀환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3월 하순 경부터 신한청년당의 간부인 여운형(呂運亨), 선우혁(鮮于爀), 이광수(李光洙), 김철(金徹), 현순(玄楯), 최창식(崔昌植), 여운홍(呂運弘) 등과 함께 프랑스조계의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에 대하여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창기에 난항이 계속됨에 따라 1922년에는 독립지사들이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 회의도 별다른 효과 없이 해체되고 그는 김규식(金奎植), 윤해(尹海), 고창일(高昌一), 원세훈(元世勳), 신숙(申肅), 도인권(都寅權), 김철(金徹), 이청천(李靑天), 최동오(崔東旿), 여운형(呂運亨), 정광호(鄭光好), 김상덕(金尙德), 조동우(趙東祐) 등과 함께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새로이 조직하고 1922년 9월에 노령(露領)으로 가 소련에 의탁하려 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사망에 따라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23년 3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1925년 2월 21일에는 상해에서 신한청년회총회(新韓靑年會總會)가 개최되어 이사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여운형(呂運亨), 한진교(韓鎭敎), 김철(金澈), 정광호(鄭光好), 박진(朴震)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인성학교(仁成學校) 이사장에 취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항일정신을 함양시키는 등 후진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일장기(日章旗) 게양을 강요하자 학교를 폐교시키고 새로운 활동방안을 모색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광조 ( 徐光朝, 1897. 2. 29 ~ 1972. 7. 10 )

서광조 기념비 전남 목포(木浦) 사람이다. 1917년 3월 23일 평남 평양(平壤)에서 장일환(張日煥), 강석봉(姜錫奉) 등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비밀결사하고 전라도지역 책임자로 선임되어 항일 활동을 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제주도(濟州島)에 거주 제한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인환 ( 朴寅煥, 1926. 8. 15 ~ 1956.3.20 )

박인환 인물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사람이다. 부친 朴光善(박광선)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빼기로 이사를 하고,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는데,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 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 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하여 그곳을 졸업한다.
졸업 뒤 부친의 강요로 1944년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입학하였나,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빌린 돈 5만원으로 시인 吳章煥(오장환)이 경영하던 낙원동의 20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받아 초현실주의 화가 朴一英(박일영)의 도움으로 간판을「茉莉書舍(마리서사)」로 재개업한다.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서점이다. 서점 명칭은 일본 시인 安西冬衛(안서동위)의 시집 「軍艦茉莉(군함마리)」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도 있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었는데,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서점이었다. 앙드레 브르통,폴 엘뤼아르,마리 로랑생,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오르페온」「판테온」「신영토」「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박인환 기념비 「마리서사」에는 김광균, 이봉구, 김기림, 김수영 등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단골이었으며,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1949년「새로운 都市와 市民들의 合唱」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였다.
6.25의 전란을 겪은 박인환은 1955년 시집 『박인환 시선집』에서 전쟁의 혼란 속에서 본 고통과 무익함의 무의미한 표현으로 무척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다.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도집 」에 몇 명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羅愛心(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朴寅換(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 그것을 넘겨다보고 있던 李眞燮(이진섭)이 그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그 악보를 들고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는데,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세월이 가면」은 훗날 1976년에 유고시집 『목마와 숙녀』에 수록되어 있다.
전쟁 이후의 황폐함과 메마른 도시 문명으로 인한 절망감, 비애 등을 서정적으로 많이 노래하였던 박인환은 1956년 31세 젊은 나이로 심장마비로 삶을 거두었다.

방정환 ( 方定煥, 1899. 11. 9~1931. 7. 23 )

방정환 인물 서울 종로(鍾路)사람이다. 1913년 선린(善隣)상업학교에 들어가 2년 중퇴한 뒤, 1917년에 비밀결사로서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여 손병희(孫秉熙)선생의 3녀 용화(溶嬅) 여사와 결혼, 1918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입학하여 「신청년(新靑年)」「신여자(新女子)」「녹성(綠星)」등의 잡지 편집을 맡아 보았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손병희(孫秉熙)의 사위로서 그의 영도 하에 천도교청년회(天道敎靑年會)의 회원으로 3, 1운동 준비에 협력하고, 또한 오일철(吳一澈)과 함께 집에서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등사하여 배포하던 중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東洋大學) 문학과에 입학해서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1921년 여름방학에 일시 귀국하여 천도교소년회(天道敎少年會)를 조직하고 어린이에 대한 존댓말 쓰기 운동을 벌였으며 1922년에는 동화집「사랑의 선물」을 간행하였다.

방정환 기념비 1923년에 민족재기(民族再起) 운동으로서의 어린이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3월 20일 잡지「어린이」를 창간하고, 이어서 고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ㆍ선포했다.
1924년에 전국 소년지도자 대회(全國少年指導者大會)를 개최하여 어린이단체의 단합을 추진했으며, 잡지「별건곤(別乾坤)」과 「신여성(新女性)」을 발간하고, 동화대회(童話大會)를 개최하였다. 1925년에는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를 조직하였다.
1927년에는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의 발족과 함께 일선에서 은퇴하고, 강연회, 동화대회, 라디오 방송 등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1928년 10월 2일부터 1주일간 서울에서 세계아동 미술전람회(世界兒童美術展覽會)를 개최하였다.
1931년 새로운 월간잡지「혜성(慧星)」을 발간하는 등 활동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하고 친구들에게 유언한 뒤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중섭 ( 李仲燮, 1916. 4. 10 ~ 1956. 9. 6 )

이중섭 인물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 사람이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의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선구적인 유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며 뒤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한 반이 되면서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유적 안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등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리고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렸다.
1935년 졸업 후 일본의 토오쿄오의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에는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
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 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면서 <서 있는 소>, <망월>, <소의머리>, <산의 풍경> 등을 출품해 커다란 찬사를 받다.

이중섭 기념비 1940년, 1943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서 수상하였으며, 1945년 귀국하여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 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 제주, 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1월 18일부터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회에는 유화와 은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을 전시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 하여 철거당하자 자학과 실의에 빠졌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내려가 여관방을 전전하면서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나,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여 병원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받다가 고독한 삶을 마감하였다.
1978년 정부수립 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장덕수 ( 張德秀, 1895. 1. 5~1947. 12. 2 )

장덕수 인물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를 졸업하자 상해(上海)에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 1918년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국내 지사(志士)들과 연락을 취하러 국내에 들어오다가 검거되었다. 이듬해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일본 정부를 방문,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역설했고, 1920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초대 주간(主幹)이 되어 언론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했으며, 勞動共濟會(노동공제회) 간부, 보성 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교수를 역임했다.
그 후 미국에 건너가 1928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을 지냈다. 해방 후 송진우(宋鎭禹), 김병로(金炳魯)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 동당 외교부장, 정치부장을 역임하며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 1947년 12월 2일 좌익분자인 종로서(鍾路署)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했다.
사건 발생시 장택상 수도 경찰청장은 2,800여명의 경찰관을 비상동원하여 서울 시내에 물샐 틈 없는 비상경계를 펴면서, 범인이 경찰복장을 착용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찰서별 비상소집을 통해 불응한 종로서 경사 박광옥을 범인으로 검거하였다.그러나 장덕수는 1938년에서 해방 이전까지의 행각으로 친일인사라는 오점을 남기고 있다. 대일본제국의 천황폐하께 몸을 바쳐 충성한다는 취지로 1939년 7월 5일 조선신궁(神宮) 앞에서 '시국대응전조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가 결성되었을 때, 장덕수는 제4분회장을 맡았으며, 임전보국단 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질 때부터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그것이 1941년 12월 결성될 때에는 김동환, 이광수, 박인덕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결전 보국 대강연회'가 부민관에서 열렸을 때, 그는 조병상(曺秉相), 윤치호, 이성근 등의 거물 친일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열변을 토했으며, '적성국가의 정체'란 제목으로 "미영 두 나라는 일견 종교의 나라인즉 愛의 위에 서 있는 국가같지만 실은 욕망과 물욕의 장본이다. 80년 전의 남북전쟁을 보라. 이것이 인종의 매매에서 나온 비극이 아니냐. 또한 영국의 아편전쟁을 보라.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개인주의요, 자유주의의 소산이다. 오랫동안 두고두고 받아온 미영의 압박과 굴욕에서 이제 동아(東亞)민족의 해방을 부르짖는 결전을 개시할 것이다.

장덕수  기념비 이제 동아민족은 압박과 착취를 당하여 뼈만 남았지만은 이제 뼈로서 단연 궐기하여 구적(仇敵) 미영을 타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라 했으며, 1944년 10월에는 국민동원총진회 주최의 강연에 최재서, 김동환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의 연제는 '대의(大義)에 철하라'는 것으로, "학생 제군 중에는 재학지를 떠나 행방을 감추고 또 집에 돌아온 자도 빨리 지원수속을 취하지 않고 선배와 뜻있는 사람의 권고까지 피하고 있다 하지 않는가. 이러한 비열하고도 언어도단의 치욕을 모르는 젊은이가 또 어데 있을까. 나는 오늘날까지 교단에서 교편을 잡고 날마다 제군의 얼굴을 대해 왔거니와, 제군들 가운데 이러한 젊은이가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라고 울먹이면서 '폐하'의 군인이 되어 반도 황민화를 실천하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또한, 악질 매국노/민족반역자의 두목급인 박중양, 윤치호, 한상룡을 고문으로 하여 1945년 7월 국민의용대 총사령부가 만들어졌을 때, 그는 모윤숙, 진학문과 함께 경성부 연합 국민의용대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 장덕수의 친일 행적에 대한 전력이다.

조봉암 ( 曹奉岩, 1898. 9. 25~1959. 7.31 )

조봉암 인물 경기도 강화군 사람이다.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 군청(郡廳)에 근무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修學)했다. 1919년 3, 1 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복역, 출옥 후 1921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東京) 쥬우오오 대학(中央大學)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할 무렵 문학작품과 사회학 방면의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사회운동의 길에 들어서 비밀결사(秘密結社) 흑도회(黑濤會)에 가담,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22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조봉암은 신흥청년동맹. 화요회 등에서 활동하는 한편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조직에 참여했고,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상해를 경유,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이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에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 문하부책(文化部責)으로 활약하다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 대표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신의주(新義州)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으로 출감하였다.출감 후 건국사업과 사회개혁을 위하여 주로 인천에서 치안유지회, 건국준비위원회, 노동조합, 실업자 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했고, 조선 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당 운영을 비판하고 박헌영(朴憲永)을 충고하는 편지가 미군 방첩대에 의해 공개된 것을 계기로 그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이후 좌익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우익(右翼) 진영에 가담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조봉암 기념비 1955년 그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진보적인 대중정당 창당을 추진하는 한편 1956년 진보당추진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제 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예상외로 200여 만 표를 획득함으로써 이승만을 대체할 유력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금기라고 할 수 있던 평화통일을 주요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 후 1956년 11월 진보당추진위원회는 창당대회를 열고 그를 위원장으로 한 진보당을 공식 출범시켰다.
1958년 1월12일 서울시경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씨외 진보당 간부 10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였다. 범죄혐의 사실은 양명산이라는 간첩이 조봉암씨에게 4만달러를 전달했다는 내용이었다. 2월 16일 조봉암씨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는 등, 진보당 관계자를 구속ㆍ기소하였다. 그 후 서울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려 조봉암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7월 2일 제1심에서는 조봉암씨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만 적용하여 징역5년이 선고되었다.
7월 5일에는 반공청년단원 200여 명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법원에 몰려가 격렬한 항의를 하였다. 그 후 서울 고등법원에서는 조봉암씨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변호인단은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59년 2얼 27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오긍선 ( 吳兢善, 1878. 10. 4~1963. 5. 18 )

오긍선 인물 충남 공주(公州) 사람으로 아버지 인묵(仁默)과 어머니 한산이씨 (韓山李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상경 후 1896년(건양 1)에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고, 1898년(광무2) 독립협회(獨立協會) 간사(幹事)에 취임, 1900년(광무 4) 세례(洗禮)를 받았다.
1901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1902년 미국유학을 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 해 10월 미국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파견 선교사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 전라북도 군산 야소교병원장(郡山耶蘇敎病院) 원장으로 추임, 1910년에는 군산 양명중학교(永明中學校), 안락학교(安樂學校) 및 교회(敎會)를 설립하였고 광주(光州) 야소교병원장, 목포(木浦) 야소교병원장, 정명고등하교(貞明高等學校)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1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동교 부속병원 의사로 있다가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1917년 5월 14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다.
국내최초로 창설된 피부과는 발전을 거듭하여, 1983년 국내 최초로 FTA-ABS, 19s(IgM)-FTA 등 매독의 혈청학적 진단방법을 도입하여 확립시킨 바 있으며, 같은 해 개설된 베체트병 특수 클리닉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단일 연구 기관으로는 가장 많은 환자수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있다.

오긍선 기념비 1921년 세브란스 의전 학감(學監), 1929년 동교 부교장(副敎長)을 지내고, 구미(歐美) 각국의 의학계를 2년간 시찰한 후 오스트리아의 비인 대학에서 피부과학을 연구했다.
1919년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기독보육원)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을 시작, 1931년 경성양로원(京城養老院:청운양로원)을 설립, 1934년 세브란스의전 교장에 취임하고, 모교인 센트럴대학에서 명예 의학박사, 뤼빌대학에서는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2년, 세브란스 의전 교장직을 정년 퇴임하고 사회사업에 전력, 8, 15 해방 후 관계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1946년 전국사회사업연맹(全國社會事業聯盟) 이사장,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韓國社會事業聯合會) 회장으로 활약했다. 그 밖에도 중앙기독교청년회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중앙노동위원회(中央勞動委員會) 대표의원 등 많은 공직과 명예직을 역임, 사회사업에 대한 공로로 많은 표창을 받았다.
1962년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또한 대한민국 공익포장(公益褒章)을 받았으며, 고아사업에 대한 공로로 새싹회로부터 제7회 소파상(小波賞)을 받았다. 죽은 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장(醫科大學葬)으로 장례되고 이 해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수여되었다.

지석영 ( 池錫永, 1855. 5. 15~1935. 2. 1 )

지석영 인물 서울 사람으로 지익룡(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935년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학자, 행정가, 어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우두법(牛痘法)의 보급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선각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두법은 천연두를 예방하는 일종의 예방 접종법으로, 예전에는 두창, 마마, 손님이라고도 불리던 천연두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아니라 다행히 생명을 구하더라도 곰보가 되는 경우가 많은 무서운 질병이었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파견된 스승 박영선(朴永善)이오다키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가 지은 《종두귀감(種痘龜鑑)》 얻어 귀국하자 이를 전수받아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자, 그해 10월 부산에 내려가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12월 하순 두묘와 종두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 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저장법,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두묘도 얻어 귀국했다. 일본 공사관 의관(醫官)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우면서 우두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일본인으로부터 의술을 습득한 죄로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두장(種痘場)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하였다. 그 해 9월 전라도 어사(御使)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에 따라 전주(全州)에서, 이듬해에는 충청도 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따라 공주(公州)에서 각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여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각 군에서 뽑혀 올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그 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 의학서인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지석영 기념비 그 곳에서 《중맥설(重麥設》과《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풀려난 후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우두보영당을 설치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으로 내무아문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 뒤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 33) 동래부사를 지냈다.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 규칙을 공포하도록 했다. 그는 한글에 조예가 깊던 강위의 영향으로 일찍이 국문에 관심을 가졌다. 국문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1895년《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여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했다.
1910년 8월에 굴욕적인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측의 간곡한 간청을 뿌리치고 대한의원에서 물러났다. 1914년에는 의생[韓醫師] 등록을 하고 소아과[幼幼堂] 진료를 하였으며 1915년부터는 전선의사회(全鮮醫師會) 회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 강압기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건강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가 별세하였다.

계용묵 ( 桂鎔默, 1904. 9. 9~1961. 8. 9 )

계용묵 인물 소설가. 본관은 수안(遂安).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며, 아버지는 항교(恒敎)이고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이다. 1남3녀 중 장남이다.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향리의 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순흥안씨(順興安氏)정옥과 혼인하였다. 졸업 후 몰래 상경하여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하여 귀향하여야만 하였다.
약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수학하였으나, 가산의 파산으로 1931년 귀국하였으며, 그뒤 조선일보사 등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정비석(鄭飛石)과 함께 잡지 《대조 大潮》를 발행하였고, 1948년 김억(金億)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首善社)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1925년 5월 《조선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 相換〉으로 등단한 이래 40 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그의 문학은 발표 시기에 따라 대체로 3기로 구별된다.
〈최서방〉(1927)·〈인두지주 人頭蜘蛛〉(1928)로 대표되는 첫 시기는,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을 그렸다는 점에서 대체로 경향파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투쟁의식이 없다는 점과 이후의 다른 작품들과 결부하여볼 때 다만 고통받는 서민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반영된 작품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번째 시기는 몇 년의 침묵 끝에 1935년 《조선문단》 제4권 제3호에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 시기가 그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의 미숙함에서 벗어난 세련된 문장기교로써 그의 문학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벽 障壁〉(1936)·〈병풍에 그린 닭이〉(1936)·〈청춘도 靑春圖〉(1938)·〈신기루 蜃氣樓〉(1940) 등이 이에 해당된다. 여기서의 주인공들은 선량한 사람이지만, 주위의 편견이나 억압, 자신의 무지로 인하여 불행 속을 헤매거나 패배자적인 처지에 처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가지지 못하는 소극적인 인물이기 일쑤인데, 이러한 경향은 작중세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고 관조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계용묵문학의 특징이자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계용묵 기념비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그 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 의학서인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광복 후 격동과 혼란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별을 헨다〉(1946)·〈바람은 그냥 불고〉(1947) 등 세번째 시기의 작품에서도 그는 현실인식의 소극성을 크게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결국, 그의 소설은 1930년대 한국문학의 언어적 미감을 세련시키고 단편양식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적극적인 현실감각 및 역사의식의 부재, 서민에 대한 관조적 시선이 빚은 현실감 결여라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그는 생전에 단편집 《병풍에 그린 닭이》·《별을 헨다》 외에 한권의 수필집 《상아탑 象牙塔》 등을 남겼다.
계용묵의 묘소에는 1962년 8월 9일 現代文學社와 文友 일동이 세운 묘비가 쓸쓸히 세워져 있으며, 후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어찌된 일인지 전혀 관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묘비에는 “중요 작품으로 백치아다다, 屛風에 그린 닭이, 별을 헨다 이밖에 60여편을 남겼다.”라는 문구와 함께 유족인 부인과 자녀, 손자소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김말봉 ( 金末峰, 1901. 4. 3~1961. 2. 9 )

김말봉 인물 여류소설가. 본명은 말봉(末鳳)이다. 부산출생.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그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경도(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까지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기자로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 亡命女〉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 됨 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5년 5월 《조선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 相換〉으로 등단한 이래 40 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그의 문학은 발표 시기에 따라 대체로 3기로 구별된다.
이어서 〈고행 苦行〉·〈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李鍾河)와 재혼,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운동 즉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과 박애원(博愛院) 경영 등의 일을 하였다. 하와이 시찰여행을 하고 온 뒤, 6·25남침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여, 〈태양의 권속〉·〈파도에 부치는 노래〉·〈새를 보라〉·〈바람의 향연〉·〈푸른 날개〉·〈옥합을 열고〉·〈찬란한 독배(毒盃)〉·〈생명〉·〈길〉·〈사슴〉·〈장미의 고향〉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 즉 애욕의 갈등 속에서도 건전하고 정의가 이기는 모랄을 지니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진 소설가였다. 대체적으로 순수문학에만 집착하는 문단을 향하여 “순수귀신을 버리라.”고까지 하였으나, 그러한 주장은 아직도 일반화되고 있지 않다.
김말봉의 묘소는 두 번째 남편 이종하(李鍾河)와 나란히 하고 있으며, 1962년 2월 9일 文友와 교우들이 세운 묘비에는 “ 密林 찔레꽃 화려한 地獄 太陽의 권속 바람의 饗宴 푸른 날개 生命 花冠의 季節 ” 그의 유고작들이 나열되어 있다.

김이석 ( 金利錫, 1915. 7.16~1964. 9. 18 )

김이석 인물 소설가. 본관은 연안. 아버지 치화(致和)와 어머니 이득화(李得和)의 4남3녀 중 차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1927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와 1933년 평양 광성고보(光成高普)를 거쳐,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938년 중퇴하였다. 조선곡산주식회사에 다니다가, 평양 명륜여상(明倫女商) 교사로 근무했다.
1946년 1·4후퇴 때 가족을 두고 월남,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이무렵 중부전선에서 종군작가단으로 활동하였다. 1953년 환도 후 《문학예술》 편집위원, 성동고등학교 강사직을 맡았다.
1957년부터 집필에만 전념하는 한편, 1958년 작가인 박순녀(朴順女)와 재혼,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1956년에 출간된 단편집 《실비명 失碑銘》으로 1957년 제4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고, 1964년 제14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일찍부터 문학적인 재질을 나타내 보통학교 때인 11세(1925)에 동요 〈돌배나무〉를 발표한 적이 있었고, 연희전문 재학 당시 단편소설 〈환등 幻燈〉(1938)을 발표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1938년 단편소설 〈부어 腐魚〉가《동아일보》에 입선되면서부터이다. 그당시 평양에서 구연묵(具然默)·김조규(金朝奎)·유항림(兪恒林)·양운한(楊雲閒)·최정익(崔正翊)·김화청(金化淸) 등과 함께 동인지 《단층 斷層》을 발간하면서, 〈감정세포(感情細胞)의 전복(顚覆)〉(1937) 등을 발표했다.

김이석의 묘역 월남 후 종군작가단에 들어 있으면서 작품활동을 재개하여, 1952년 〈실비명〉을 발표하였고, 이어 〈외뿔소〉·〈달과 더불어〉·〈소녀 태숙(台淑)의 이야기〉·〈광풍(狂風)속에서〉·〈뼈꾸기〉 등을 발표하였다.
그밖에 〈실비명〉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면 冬眠〉(1958)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또한 단편소설 외에 1962년 역사장편소설 〈난세비화 亂世飛花〉를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는데, 1964년 역사장편물 〈신홍길동전 新洪吉童傳〉을 쓰던 중 죽었다.
대표작〈실비명〉·〈외뿔소〉·〈학춤〉에서와 같이 사적 체험과는 거리가 있는 주인공의 꿈의 상실에 대한 좌절과 상심을 통해 인생의 비애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관앞골 기억〉·〈교련과 나〉 등의 1920년대 식민지사회의 단면을 제시한 소년시절의 회상이나, 〈뼈꾸기〉·〈동면〉·〈지게부대〉·〈허민선생〉·〈재회〉 등의 사소설적 접근으로,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조명한 1·4후퇴 때 월남한 지식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의 기록과 같이 사적 체험을 위주로 서술하였다.

김이석의 묘비 뒷면 이들 작품에는 식민지시대로부터 6·25남침의 전후까지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의 한국 지식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의 문체는 치밀한 구성과 간결한 표현으로 한국적 정한(情恨)의 세계를 관조하는 인생의 담담한 심경으로 형상화하여 독자에게 호소력을 가진다.
김이석의 묘소는 한강을 바라다보며 양지 바른 망우산 언덕에 잘 관리되고 있었으며, 그의 묘비에는 작품 “失碑銘”의 일부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오색기가 하늘 높이 펼쳐지는 매화포 소리가 콩하고 우려지면 그 소리를 따라 백여 명의 건아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서 평양역을 향하여 달리었다. 시가 곳곳에서는 군악이 울려났고 시민들의 환호 소리는 하늘을 진동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채동선 ( 蔡東鮮, 1901. 6.11~1953. 2. 2 )

채동선 인물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졸업 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에 입학해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했으며 대학을 마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 슈테르헨 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했다. 1933년 정지용의 시 〈그리워〉에 곡을 붙였는데 그의 동생인 소프라노 선엽(善葉)의 독창회에서 처음 발표되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37년 작곡발표회를 갖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했다.

채동선의 묘역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육자배기〉·〈춘향가〉 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새야새야〉·〈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 지휘도 했다. 52세에 부산 피난 중 급성복막염으로 죽었다.
1983년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망향〉·〈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 진혼곡 〈조선〉·〈조국〉 등이 있다.
채동선의 묘소에는 ‘채동선 기념사업회’가 세운 기념비가 이은상 時 채동석 曲의 가곡 ‘그리워’의 가사와 함께 채동선의 생전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채동선의 묘비 뒷면 묘비에 에는 “채동선 선생은 53세란 짧은 나이에 타계하였으나 불멸의 가곡 「그리워」를 통해 살아있는 미족혼을 영원히 우리의 마음 속에 굽이치고 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는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관직을 마다하며 초야에 묻혀 음악 예술 속에 온통 마음을 불살라버린 선생이시지만 해방이 되자 참고 살아온 정열이 일시에 폭발하려는 듯 나라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셨다.
한편 조국의 독립과 영원한 번영을 위해 천곡을 작곡하셨고 우리 고유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민요를 채보하셨다. 선생의 모든 예술 작품은 애국심의 표현이라 하겠거니와 음악 속에 담겨있는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79년 문화훈장을 추서하였거니와 선생이 남긴 업적에 조금의 보탬이 되었기를 바란다. 1983년 2월 2일 한상우 씀 ” 이라 기록되어 있다.

차중락 (車重樂, 1941~1968.11.10 )

차중락 기념비 요절가수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될 만큼 건장한 몸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박은 뛰어난 모창으로 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는 '코리언 엘비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의 정서를 적절하게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던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서울 신당동 토박이로 전문학교 마라톤선수 출신으로 토건업과 인쇄소를 경영했던 부친 차준달과 경기여고 단거리선수 출신인 모친 안소순의 8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중락과 함께 11명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아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첫째는 역도선수, 둘째는 경복고 밴드반장과 연대 야구부 주장을 맡았던 재주꾼이었고 넷째인 중광은 성균관대 야구부 투수이자 그룹 다크 헤어즈의 보컬이었다.
다섯째 중용은 양정고의 마라톤선수이자 그룹 가이스&돌스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직업가수로 형제들 중 차중락과 외모와 목소리가 가장 흡사해 대역으로도 활동했을 정도였다.
낭만적이고 유순한 성품의 셋째 차중락은 경복고시절 음악보다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진학한 한양대 연극영화과 신입생 시절에는 극장을 안방 드나들 듯했다.
영화마니아였던 그가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의 음악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심취하면서부터이다. 좋아했던 가수는 폴 앵카와 엘비스 프레슬리. 가끔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반응도 좋았다.
동경에서 팝가수로 활약하다 돌아와 미8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손목인의 큰 아들 후랭키 손은 차중락의 천재적인 엘비스 모창에 흠뻑 반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무대에 설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권고로 차중락은 일본에서 노래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 수업을 받아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63년 학교까지 중퇴하고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63년 10월 사촌형인 차도균의 권유로 그룹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의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인 시민회관 공연은 큰 화젯거리였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때쯤 차중락은 수년간 사귀어오던 이대생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신세기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 역시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신세기.66년11월10일>을 엘비스의 히트곡 를 편곡해 동병상련의 차중락에게 선사했다.
당시는 반주음악 완성 후 가수가 노래를 불러 녹음을 완성하던 때. 그룹 키보이스는 반주음악의 템포와 필링을 함께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계절의 분위기와도 맞아 떨어져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차중락에게는 집요한 솔로 독립 유혹이 거셌다. 이때가 67년. 솔로 독립 후 차중락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콜라를 두병이나 마셔야 겨우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는 눈코뜰새없는 생활의 연속이였다.
당시 그의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호로, 좋은 친구사이였던 차중락과 배호는 가요황금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그룹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들의 사랑을,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인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솔로 독립 후 최대 히트곡은 TBC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던 <사랑의 종말-신세기. 1967년>이다. 이곡은 TBC 방송가요 대상 남자 신인가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명곡으로 꼽힌다. 그러나 차중락 개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이었다. 잘생긴 외모, 건장한 체구,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성품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추어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27세의 건장했던 젊은 가수도 인기라는 족쇄에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연예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차중락은 결국 서울 동일극장 무대위에서 고열로 쓰러진 후 1968년 10월 11일 자신의 대표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발표 1주년 날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가수생활동안 겨우 20여곡만을 남겼지만 가을과 낙엽의 계절을 대표하는 명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채 낙엽을 사랑하는 가을연인들을 위해 올해도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차중락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양지바른 곳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1969년 2월 11일 건립된 추도비에는 조병화 詩 「낙엽의 뜻」이 기념사업회 명의로 새겨져 있다.

최학송 ( 崔鶴松, 1901. 1. 21~1932. 7. 9 )

최학송 문학비 소설가. 본명은 학송(鶴松), 아호는 서해(曙海)·설봉(雪峰) 또는 풍년(豊年).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농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1910년 아버지가 간도지방으로 떠나자 어머니의 손에서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보내었다. 유년시절 한문을 배우고 성진보통학교에 3년 정도 재학한 것 외에 이렇다 할 학교교육은 받지 못하였다.
소년시절을 빈궁 속에 지내면서 《청춘 靑春》·《학지광 學之光》 등을 사다가 읽으면서 문학에 눈을 떴고, 그때부터 이광수(李光洙)의 글을 읽으면서 사숙(私淑)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고향을 떠나 간도로 건너가 방랑과 노동을 하면서 문학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23년 간도를 나와 국경지방인 회령에서 잡역부 일을 하기도 하였다.
1924년 작가로 출세할 결심을 하고 노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홀로 상경하여 이광수를 찾았다. 그의 주선으로 양주 봉선사(奉先寺)에서 승려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두어달 있다가 다시 상경하여 조선문단사(朝鮮文壇社)에 입사하였다.
1927년 현대평론사(現代評論社)의 기자로 일하기도 하였고, 기생들의 잡지인 《장한 長恨》을 편집하기도 하면서, 1929년 중외일보(中外日報)기자, 1931년 매일신보(每日申報)학예부장으로 일하다 죽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 월요란(月曜欄)에 단편소설 〈토혈 吐血〉을 발표한 일이 있으나 같은 해 10월 《조선문단》에 〈고국 故國〉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토혈〉이 처녀작이라면, 〈고국〉은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대략 장편 1편, 단편 35편 내외를 발표하였다.
그의 소설들은 빈궁을 소재로 하여 가난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대체로 세 가지 경향이 있다. 첫째, 조국에서 살지 못하고 간도로 유랑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고국〉(조선문단, 1924)·〈탈출기 脫出記〉(조선문단, 1925)·〈기아(饑餓)와 살육(殺戮)〉(조선문단, 1925)·〈돌아가는 날〉(1926)·〈홍염 紅焰〉(조선문단, 1927)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함경도 지방의 시골을 배경으로 무식하고 가난한 노동자나 잡역부들의 생활을 그린 소설로 〈박돌(朴乭)의 죽음〉(조선문단, 1925)·〈큰물 진 뒤〉(개벽, 1925)·〈그믐밤〉(신민, 1926)·〈무서운 인상(印象)〉(동광, 1926)·〈낙백불우 落魄不遇〉(문예시대, 1927)·〈인정 人情〉(신생, 1929) 등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잡지사 주변을 맴도는 문인들의 빈궁상을 그린 소설로 〈팔개월 八個月〉(동광, 1926)·〈전기 轉機〉(신생, 1929)·〈전아사〉(동광, 1927) 등이 이 계열에 속한다. 이러한 빈궁상의 제시는 사회의식의 소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체험의 작품화’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빈궁 속에 있는 사람들의 호소와 절규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1920년대 경향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최학송의 묘소는 1959년 김광섭 시인 등이 미아리 공동묘지에 있던 최학송의 묘소를 망우리 공원묘지로 옮긴 뒤 40여년 방치되어 오다가, 곽근 동국대 교수가 각종 문헌 등을 뒤져 어렵게 발견하고 우리문학기림회가 최학송 문학비를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1990년 발족 이래 한국문학을 기리고, 소외된 문인들의 업적을 선양해 온 문학애호인 모임이다. 그동안 김우진, 홍명희, 박화성, 조운, 이태준, 김소운. 심연수(연변의 항일시인) 등 18명의 문학비를 건립했다.

설의식 ( 薛義植, 1900~1954. 7. 21 )

설의식 인물 언론인·평론가. 호는 소오(小悟). 함경남도 서천출신.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2년 《동아일보》 사회부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주일특파원·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29년 주일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란을 집필했고, 1931년 잡지 《신동아 新東亞》를 창간할 때에는 편집국장대리로 있으면서 제작을 총괄하였다.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그 자매지 《신동아》·《신가정 新家庭》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일으켜 신문사를 떠났다.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다. 1947년 순간 《새한민보》를 창간하였다.
저서로는 《해방이후》·《해방이전》·《화동시대 花洞時代》·《금단(禁斷)의 자유》·《통일조국》·《치욕의 표정》·《역풍기(逆風期)의 진로》·《소오문장선 小悟文章選》 등이 있다.
설의식의 묘소는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념비는 없으나 단아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이병홍 ( 李炳洪, 1891.~1955.10.17 )

이병홍 기념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람이다. 1919년 3월 3일에 있은 고종황제의 국장일을 계기로 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고, 진주 또한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진양군 내에서 발생한 주요한 만세 시위 운동은 정촌면과 미천면을 들 수 있다. 단성면 배양리에 거주하던 이병홍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정촌면 관봉리 강재순(姜在淳)에게 서울의 3.1운동을 목격하고 숨겨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넘겨주고 동지 이종언(李種彦)과 수백장의 선언서를 찍어내어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여 다 같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등 조국 광복에 힘썼다. 상해임시정부 요인으로도 활약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 1,2대 민의원과 반민특위(36년 일제 침략기 동안 일본에 아첨한 사람을 가려 벌주는 위원회) 조사부장을 역임했다.
반민법 개정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대하여, 1949년 2월 17일자 연합신문의 「대통령 담화는 경악할만한 거라는」제하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제1조사부장 이병홍 명의의 반박 담화를 보면, “15일부 대통령담화는 그 내용이 너무도 우리들의 상식과 상치되므로 다시금 그 담화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는 사실 대통령이 그런 담화를 발표하였다고 믿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일국의 원수로서 국회에서 결정되고 대통령 자신이 서명 공포한 법을 그 법이 아직 때도 되기 전에 조변석개(朝變夕改)한다면 그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하여도 대단히 불쾌한 일이다.
더욱 반민법은 민족의 대의(大義)를 세계와 후세 자손에게 밝히는 것이므로 말이 법률이지 우리들은 그 법률을 일종의 민족적 성전(聖典)으로 생각하고 이 법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옷깃을 바르게 하며 경건하고 엄숙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다. 이 감정은 전 민족이 동일하게 가지리라고 믿는다. 그런 법률을 대통령이 만약 개정을 요청하였다면 우리는 참으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흔히 와전이 많은 세상이므로 동 발표가 진상이 아니기를 빈다. 더구나 고문 운운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일국의 원수로서 반민자들의 허위적 낭설을 믿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없다.”라는 담화로 반민법의 본래 취지를 퇴색시키로는 이승만 정권의 반민법 개정을 경계하고 있다.
이병홍은 1955년 10월 17일 새벽 심장마비로 삼청동(三淸洞)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묘소에는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가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 ( 淺川巧, 1891. 1.15~1931. 4. 2 )

아사카와 다쿠미 묘 전경 아시카와 다쿠미는 일본 산리현(山梨縣) 북거마군(北巨摩郡)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조선에 와서 수목(樹木)연구를 하면서도 조선자기와 민간공예품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를 수집, 조사하는데 정열을 바치며, 마흔 살의 짧은 생애를 조선과 조선 예술에 대한 지극한 존경 속에 살다 그 뼈를 이 땅에 묻은 친한주의자다.
1922년부터 조선 민예미술의 전도사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와 함께 전라도 일대와 불국사, 그리고 관악산 요적 같은 조선 산천의 문화유적지를 샅샅이 둘러보고, 1924년 4월에는 허다한 난관을 물리치고 경복궁 집경당 내에 조선민족 미술관을 세웠다.
3. 1운동이 끝난 지 불과 5년 여 만에 조선 민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미술관을 세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야나기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조선을 들락거리는 처지였지만 아사카와는 조선에 거주하는 총독부 산하 산림과 직원의 신분이었고 따라서 그에게는 극우 성향의 일본인들로부터 끊임없는 협박과 살해의 위험이 뒤따랐다고 한다. 야나기는 조선의 민예 미술품을 상당히 많은 양을 직접 수집하기도 했지만, 아사카와는 조선 미술을 평가하고 예찬하는 저술을 남겼을 뿐 소유나 수집에 대한 집착의 흔적 같은 것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다.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세웠던 집경당의 조선민족 미술관은 이제는 없지만, 야나기는 조선민족 미술관을 세운 지 10여 년 후(1936년) 도쿄 메구로구 자신의 집 앞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하여 이곳에다가 조선의 옹기를 비롯하여 자신의 조선 민예 수집품의 상당 부분을 보관하여 현재까지 전시하고 있다.

임업시험장 직원 일동이 세운 묘비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과에 1914년부터 1922년까지 근무했으며, 1922년부터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잣나무 종자의 노천매장(露天埋藏) 발아 촉진법』을 개발했다.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1931)','조선의 선(膳)'등 조선의 미술 관련 저서를 냈고, 병약하여 1931년 갓 마흔의 나이로 경성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한국사랑은 타계한 지 70여년이 지난 요즘 일본에서 북소리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북(와타이코, 和太鼓) 연주자인 하야시 에이테쓰(林英哲)가 이를 북 소리로 재구성한 공연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독창적인 연주로 일본 북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을 듣는 하야시씨는 아사카와의 한국사랑을'나무의 소리''망우(忘憂)' 등 6장(章)으로 나누고 장마다 ‘둥둥둥’ 북 소리로 그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하야시씨는 "아사카와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흐르는 수로(水路)에 아무도 모르게 피어난 연꽃과 같은 사람"이라면서 그래서 공연의 제목도'수로의 연꽃'으로 했다고 한다.
2001년 12월 8일 도치기현 마시코마치(益子町)에서 시작된 '수로의 연꽃'공연은 16개 시를 순회했으며, 특히 2002년 12월 20일 아오야마(靑山)극장의 공연에서는 북과 샤미센(三味線, 일본의 세줄 현악기), 그리고 샤쿠하치(尺八, 피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품어낸 '밀양아리랑'의 변주곡은 청중을 매료시켰다.
친한 일본인 아사카와의 묘지는 임업시험장 친목단체임 홍림회(洪林會)에 의해서 잘 관리되고 있으며, 임업시험장 직원 일동 명의의 묘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라고 새겨져 있다.

명온공주 ( 明溫公主, 1810.10.13~1832. 6.13 ), 김현근 ( 金賢根, 1810.12.12~1868. 8.25 )

명온공주 기념비 명온공주는 순조(純祖)와 순원왕후(純元王后) 사이의 제1공주로 부마(駙馬) 간택을 위하여 1823년(순조 23) 5월 2일에 12세에서 15세의 동자에게 금혼령(禁婚令)을 내리고 단자(單子)를 들일 것을 순조가 명하면서 시작되었다.
명온공주방가례등록(明溫公主房嘉禮謄錄, 순조 23년 발간)에 의하면, “부마로는 예조의 택일에 따라 5월 22일 初揀擇(8명), 25일 再揀擇(3명), 6월 2일 三揀擇을 하여 進士 김한순(金漢淳)의 아들 賢根(초간택, 재간택 명단에는 이름이 承賢으로 나온다)을 정하고 동녕위(東寧尉)에 봉작하였다. 이후 納采(6월 17일), 納幣(6월 25일), 命服內出(7월 7일), 각종 習儀(7월 8일-11일)를 거쳐 7월 17일에 친영(親迎)과 동뢰연(同牢宴)을 행하고, 7월 17일에 견구고례(見舅姑禮)를 실시하였다.”라고 하여 김현근을 부마로 삼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명온공주는 김현근과 결혼 후, 즉 지금의 태화빌딩 앞 길 건너의 관훈빌딩 자리 일대(종로구 관훈동 198번지 18호) 죽도궁(竹刀宮)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마 김현근이 심한 정신질환으로 발작을 하게 되어 집안은 물론 동네를 온통 소란하게 만들어 부마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으며, 당시 세도가 안동김씨 문중의 체면과 명예에도 크게 손상이 되었다.
왕가에서는 물론 김씨 문중에서도 부마 김현근의 정신질환을 치료하기위해 노력했으나 백약 무효 하여 마지막으로 무속적인 치료 방법으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경악법(驚愕法)으로 치료코자 했다. 경악법이란 환자를 크게 놀라게 하여 환자의 몸속에 있는 악귀를 쫓아내게 하는 치료법이다. 쉬운 예로 딸꾹질을 할 때, 딸꾹질을 멈추게 하는 것도 일정의 경악법이라 할 수 있겠다.
밤이면, 김현근을 마당 한가운데 앉혀놓고 대나무로 큰칼을 만들어 양손에 든 무당이 요란한 가락에 따라 난무하면서 환자의 둘레를 빙빙 돌다가 환자가 잠깐 졸거나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틈을 타서 가지고 있던 죽도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여 환자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하여 그 몸에 붙은 악귀를 쫓아내려 했다.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세웠던 집경당의 조선민족 미술관은 이제는 없지만, 야나기는 조선민족 미술관을 세운 지 10여 년 후(1936년) 도쿄 메구로구 자신의 집 앞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하여 이곳에다가 조선의 옹기를 비롯하여 자신의 조선 민예 수집품의 상당 부분을 보관하여 현재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매일 죽도를 들고 춤을 추는 소리와 죽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담 밖까지 들려나와 그 후로부터 동네 사람들이 이 집을 '죽도를 들고 춤을 추는 궁' 이라고 하여 '죽도궁(竹刀宮)이라 하였고 때로는 '죽동궁(竹洞宮)'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향토사학자 김용봉 선생의 글에서) 이렇게 명온공주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연유였는지는 모르나 여동생 복온공주(福溫公主)에 이어 결혼한 지 8년 만인 1832년(순조32) 22세의 나이로 졸서(卒逝)하였다.
명온공주가 아버지인 순조(純祖), 오빠인 익종(翼宗)에게 보낸 한글 내간문이 전해오고 있다. 그 중 명온공주가 오라버니인 익종에게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지어 보내면서 시평(詩評)을 부탁하는 편지는 이러하다.

낫것 잡사오시고 안녕이 디내오시압나니잇가? 이글은 쇼인이 지어사오니, 감(鑑) 하오시고 엇더 하온가 보아 주오심 바라압나이다. 규츄샹아댱 구츄서리 밤이 기러시니, 독대등화경 홀노 등잔꼿 가배아음을 대하엿도다. 져두요샹향 져두하야 먼니 향을 생각하고, 격챵쳥안셩 챵을 격하야 거리기 우난 소래를 드럿더라. 명온공주방상장례등록(明溫公主房喪葬禮謄錄, 순조 33년 간행)에 의하면, “명온공주가 졸서한 1832년 6월 13일 당일에는 명온공주의 상을 앞서 죽은 복온공주(福溫公主)의 예에 따라 치르기로 하고, 대전ㆍ중궁전(大殿·中宮殿) 등에서 호상중 사(護喪中使), 별유중사(別遣中使), 간검중사(看檢中使), 종사관(從事官), 내수사호상관(內需司護喪官), 서원(書員) 등을 차출하는 한편, 호조(戶曹), 이동관(履洞宮), 재동관(齋洞宮), 내수사(內需司) 등에서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고 있다. 이 날 목욕습(沐浴襲), 반함(飯含), 결교(結絞), 소렴이봉(小殮移奉) 등의 의식을 치루었다.
15일에는 대렴(大殮), 성빈(成殯), 입관(入棺)을 행하고, 16일에는 성복(成服)과 함께 기복(期服), 대공(大功), 소공(小功), 세마(細麻) 등의 복제(服制)를 정하였다. 6월 17일에서 29일까지 13차에 걸쳐 관에 칠을 완료하고, 7월 1일 관상서상자(棺上書上字)하여 7월 3일에 結 (거적 따위로 관을 싼 위에 밧줄로 얽어 동여 매는 것)하였다. 한편 장지(葬地)는 6월 21일부터 여러 후보지를 간심하기 시작하여 7월 14일에 동부(東部) 숭신방(崇信坊) 종암리(鍾巖里)을 장지로 최종 확정하고, 15일에 봉표(封標)하고 사표(四標)를 정하였다. 장지가 결정됨에 따라 7월 16일에 각종 일시를 택일하고, 17일부터 묘소의 각종 역을 시역(始役)하여 8월 8일까지 참파토(斬破土), 개금정(開金井), 묘소천광(墓所穿壙), 외관(外棺) 제작과 결(結) , 조주(造主), 보토(補土), 사초(莎草) 등을 완료하였다.
이후 계빈(啓殯), 발인습의(發引習儀)를 거쳐 8월 14일 발인하여 15일에 하관하고, 15일-20일 사이에 우제(虞祭), 졸곡제(卒哭祭), 제(祭) 등을 행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은 조선 후기 세도가, 안동(安東) 김씨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5대손이며, 15세에 부마인 동녕위가 되었다. 字는 성희(聖希)이고 고종 2년(1865년)에 상보국(上輔國)에 가자(加資)되고 돈녕ㆍ판의금부사(敦寧 ·判義禁府事)를 지냈으며, 죽은 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에게 시집을 가서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되며,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명온공주가 안동 김현근에게 출가하니 당시 왕가의 외척인 안동김씨 일문의 막강함은 짐작할 만하다. 이 시기는 정조(正祖)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 난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일찍 죽자 순조는 1800년(정조 24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이며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게 되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892년(壬辰, 고종 29년) 6월 건립된 김현근 관련 비문을 살펴보면,
『 명온공주(明溫公主)를 장사지내고 나서 37년이 지나 부마도위(駙馬都尉) 김공이 세상을 떠나자 2년 후에 공주의 묘소에 합장하였으니, 묘소는 바로 양주(楊州) 종암(鐘巖) 유좌(酉坐의 언덕이다.
그 뒤 23년이 되어 공의 손자 참판 덕규(德圭)가 공의 지장[誌狀:묘지(墓誌)와 행장(行狀)]을 받들고 와서 나[韓章錫]에게 표천[表阡:묘표(墓表)]의 문자를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 “그대의 외조부 연천(淵泉) 홍공[洪公:洪奭周]께서 왕의 교시(敎示)를 받들어 공주의 비문을 찬술하였는데, 지금 한 갑자(甲子:한 갑자는 60년을 이름)가 지나고 그대가 또 사관(史官)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감히 비문을 청합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 보건데, 공의 휘는 현근(賢根)이고 자는 성희(聖希), 호는 죽사(竹史)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선원(仙源) 문충공(文忠公) 상용(尙容)의 팔대손이다. 아버지의 휘는 한순(漢淳)이니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평산(平山) 신씨(申氏)이니 각(慤)의 따님이다. 할아버지 휘 이양(履陽)은 이조 판서로 치사(致仕:관직에서 물러남)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는 휘가 헌행(憲行)인데 판관(判官)을 지냈고 영의정의 증직을 받았다.
공은 순조(純祖)경오(庚午;1810년) 12월 12일에 출생하여 열네 살에 공주에게 장가들어 동령위(東寧尉)에 제수되었다. 공은 두 번 사명(使命:사신으로 받은 명령)을 받들었고 여섯 번 종묘 제례(宗廟祭禮)의 향관(享官:제관)이 되었으며, 13년 동안 제거(提擧:조선 말기, 장악원.사옹원.상의원.봉상시.종묘서의 으뜸 벼슬)를 맡았다. 지금의 임금 을축(乙丑;1865,고종 2년)에 특명으로 상보국(上輔國). 돈령부사(判敦寧府事).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품계(品階)에 올랐으니 특별한 예우였다. 공은 지성스러운 품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병환 중에는 시중들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고 거상(居喪) 중에는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여서 몸이 야위어 예절의 법도를 벗어났다. 백씨인 판서공과 밤낮으로 함께 침상을 마주하면서 화목하고 즐겁게 지냈다.
공이 동자(童子;관례를 치르지 않은 어린 아이)일 때 왕이 불러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시험하니 뜻이 통달하고 언사(言辭)가 분명하여 순조 임금께서 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왕궁의 이실[貳室;별실(別室)]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서는 더욱 신중하고 침착하여 스스로 자제하고 분수를 지켰다. 부지런히 공무에 종사하여 사정(私情)에 매이지 않았으며 성실하게 사람들을 대우하였다. 공은 평소에 산림(山林)과 천석(泉石)을 좋아하여 동문(東門) 밖에 정자를 지어 놓고 거문고와 서책을 좌우에 두고 벗하였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초연히 속세 밖의 세상에 마음을 두었다.
만년에 충청도 결성(結城)에 있는 선친(先親)의 묘소 옆에서 거상의 의례(儀禮)를 지키려하였으나 병환이 깊어져서 집안 사람들이 도성의 사가로 돌아가 의원의 치료를 받을 것을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아 백씨께서 눈물을 흘리며 힘써 권한 뒤에야 마침내 길을 떠나 도성에 들어온 지 엿 세 만에 졸하니 무진(戊辰:1868, 고종 5년) 8월 25일이다.
왕이 부고(訃告)를 듣고 슬퍼하여 특별히 상국에 추증하고 동원(東園: 관청.능.묘에 쓰는 기물의 제조와 공급을 맡는 곳)에 속한 기물을 부의로 보내어 상중의 예식과 장례를 전례(典禮)에 따라 치르도록 하였다.

계자(系子) 병삼(炳三)은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으로 이조 참판의 증직을 받았으나 일찍 졸하여 족질(族姪) 증이조 참판(贈吏曹參判) 병관(炳瓘)의 아들 덕균(德均)을 맞아들여 손자로 삼아 <덕규(德圭)라> 이름을 고치게 하였다. 딸은 덕수(德水) 이씨 이석영(李碩永)에게 출가하여 아들 종갑(種甲)을 두었다. 서자(庶子) 병수(炳洙)는 판관을 지냈고 아들 복규(復圭). 영규(寧圭)를 두었으며, 병하(炳河)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방어사(防禦使)를 역임하였고 양자는 태규(泰圭)이다. 병룡(炳龍)은 음직(蔭職)으로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딸 셋을 두었으니 맏딸은 은진(恩津) 송씨 송기헌(宋夔憲)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은진(恩津) 송씨 송지순(宋誌淳)에게, 그 다음은 완산(完山) 이씨 이인섭(李寅燮)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비록 일찍이 귀하게 되었으나 법도를 따르고 실천하여 40여 년 동안 궁주에 출입하면서도 항상 겸손하고 자중자애하여 다섯 왕조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현량한 의빈(儀賓:왕실의 사위)이라고 칭송이 성대하였으니, 참으로 자손들이 본받을 만하다. 임금이 공의 죽음을 애도하여 내린 교시(敎示)에 이르기를, “마음을 조심하고 언행을 삼가고 일생 동안 지조와 분수를 지켰다.” 고 하였으니, 그대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 능히 화곤(華袞:왕공이나 귀족이 입는 화려한 예복. 곧 귀족의 신분)이 백세가 되도록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다섯 번째 임진(壬辰: 1892, 고종 29년) 6월 일 고쳐 세우다.

안창호 ( 安昌浩, 1878. 11. 9 ~ 1938. 3. 10 )

안창호 인물 평남 강서(江西) 사람이다.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救世學堂:一名 元社宇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동회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 발전함에 따라 평양에서 관서지부(關西支部)를 발기하고 쾌재정(快哉亭)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자각(自覺)을 호소하였다.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도 병행해서 추진하였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 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친목회(韓人親 睦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5년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여 상부상조 조국광복(相扶相助 祖國光復)을 목적으로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는 등 활동하였다.
1907년 고국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귀국하였으며, 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각 주요도시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두고,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차리는 등 정치·교육·문화의 여러 방면에 걸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세웠던 집경당의 조선민족 미술관은 이제는 없지만, 야나기는 조선민족 미술관을 세운 지 10여 년 후(1936년) 도쿄 메구로구 자신의 집 앞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하여 이곳에다가 조선의 옹기를 비롯하여 자신의 조선 민예 수집품의 상당 부분을 보관하여 현재까지 전시하고 있다.
191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를 파견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를 내무총장에 선임하자 상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한 그는 연통제(聯通制) 실시, 독립신문 발간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지도하였다. 동년 7월 2일에는 임시사료편찬회를 구성하고 그 총재가 되어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 전4권을 편찬, 발행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대(對)미국의원시찰단주비위원장이 되어 북경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 서울에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 평양에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뒤에 이 두 단체가 합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가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따라 일경은 프랑스조계 경찰의 협조로 독립운동가의 일제 검거를 실시하였다. 그는 이러한 정보를 알고서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상해 하비로(霞飛路)에 있는 이유필(李裕弼)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동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았다.
1935년 2월 대전감옥에서 출옥한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방을 순회하며 계몽 강연을 하였다. 그후, 평남 대보산(大寶山)에 은거하여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으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同友會) 관계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중 중병(重病)이 들어 동년 12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에 서거하여 망우리 묘지에 자리를 잡았으나, 1973년 11월 10일 탄신 95주년과 흥사단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9-9 도산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송진우 ( 宋鎭禹, 1889. 5. 8 ~ 1945. 12. 30 )

송진우 인물 전라남도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 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과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 망우리 묘지에 자리를 잡았으나 1966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산43-2번지 지향산 기슭에 천장하고, 다시 1988년 5월 3일 서울국립묘지로 안치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종완 ( 趙鍾完, 1891. 3. 15 ~ 1947. 8. 20 )

평남 강서(江西)사람이다. 1911년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졸업한 후 국권회복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20년부터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지원을 위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이후 일경에 피체되어 1921년 6월 9일에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평양에서 이윤재(李允宰), 오경숙(吳敬淑), 김찬종(金燦鍾), 김항복(金恒福) 등이 중심이된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에 가입하였다.
동우구락부가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와 통합하여 결성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1926년 1월경 가입하여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 경 일경에 피체되어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으나 다시 기소되어 1936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7년 8월에 유명을 달리하고 망우리 묘지에 자리를 잡았으나, 1994년 5월 10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으며 아직도 묘자리에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백대진 ( 白大鎭, 1892. 2. 5~1967. 5. 9 )

서울 사람이다. 1920년 8월 매일신문(每日新聞)의 특파원으로 동삼성(東三省) 심양(瀋陽)에서 활동하던 중 미국(美國) 국회의원 시찰단과의 신문기자 회견을 한 기사가 배일(排日)적이였다는 이유로 일경에 의하여 신문사를 강제로 사직했다.
1922년 11월 월간지인 ≪신천지(新天地)≫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 조선의 일본통치가 폭력에 의한 강압정치라고 규탄하면서 독립사상을 선전하여 고취시키는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2년 11월호에서 '일본위정자(日本爲政者)에게 여(與)함'이란 제목하에 친일단체에 대한 소위 '참정권 문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의식 발달(民族意識發達)'의 장에서는 4천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서 국내외에 자랑할 만한 민족이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역설하다가 1922년 11월 6일 일경에 피체되었으며 동 잡지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동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신문지법(新聞紙法)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으며 1923년 1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됨으로 옥고를 치렀다.
1967년 유명을 달리했으며 망우리 묘지에서 1998년 10월 21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정부에서는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찬익 ( 朴贊翊, 1884. 1. 2 ~ 1949. 3. 9 )

박찬익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며, 朴昌益으로 부르기도 했다. 1904년 관립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차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하였다. 1907년 초에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ㆍ활동하였다.
그 뒤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專習所)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박승익(朴勝益) 등 10여 명과 같이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동(靑坡洞)에 한국인학교를 설치하고 애국과 자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후 상해로 건너 가 손문(孫文)을 따라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하여 만청(滿淸)정부를 타도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1912년 7월에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박은식(朴殷植)을 총재로 추대하였으며, 신채호(申采浩) 김규식(金奎植) 이광(李光)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21년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 1940년 임정이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駐華代表團長)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하였다.
1949년 유명을 달리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 93년 11월 19일 서울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현재 망우리에는 봉분과 함께 비석이 남아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임방울 ( 林芳蔚, 1904. 4. 20 ~ 1961. 3. 8 )

임방울 인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사람으로,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14세 때 박재현(朴載賢)문하에서〈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웠고, 뒤에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수궁가〉·〈적벽가〉를 배웠다.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성량도 풍부하였다. 오랫동안 수련한 그는 25세 때 상경하여 송만갑(宋萬甲)의 소개로 처녀무대에서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창작으로 전하는 ‘쑥대머리’를 비롯한 많은 음반을 내었는데, 특히 일본에서 취입한 ‘쑥대머리’는 우리나라·일본·만주 등지에서 100여 만장이나 팔렸다 한다.
그뒤 음반취입과 판소리 공연에만 힘을 쏟았고 창극운동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판소리 전통을 최후까지 고수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한편으로는 서편제 소리의 최후 보루라고도 하고 있다.
판소리 다섯 마당을 다 잘하였지만 특히 〈춘향가〉·〈수궁가〉·〈적벽가〉를 잘하였다. 1960년에 원각사(圓覺社)에서 〈수궁가〉 발표회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몇 가지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녹음하여 둔 테이프를 복사하여 취입한 음반이 전하고 있는 〈수궁가〉와 〈적벽가〉이다. 일제 때에 그는 이화중선(李花仲仙)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명창이었으나 판소리의 사설에는 치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많은 음반 가운데 〈춘향가〉에서 ‘쑥대머리’, 〈수궁가〉에서 ‘토끼와 자라’ 대목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소리는 박귀희(朴貴姬)·한애순(韓愛順)·신평일(申平日)·김용준(金龍準)·성우향(成又香) 등이 이어받았다.
1961년 별세하여 망우리에 안장하였으나,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 산 45-1 소재 남한강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강학린 ( 姜鶴麟, 1885. 6. 1 ~ 1941. 7. 5 )

강학린 기념비 함북 성진(城津) 사람으로, 1919년 3월 7일 당시 성진군 성진읍(城津邑) 욱정기독교회(旭町基督敎會) 목사로 재직하던 중 김상필(金相弼)·강희원(康禧元)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3월 10일 캐나다 선교사 구예선(具禮善)이 운영하는 제동병원(濟東病院) 광장에 모인 5천여 명의 군중들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궐기사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벌여 일본인 상가, 경찰서, 우체국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경이 무력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의 분노를 사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이날의 시위로 인하여 그는 안성윤(安聖允) 등과 함께 주동 인물로 피체되어 1년 4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망우공원묘지에는 그에 관한 기록도 묘소도 없으나, 기념비가 남아 있다.

만족도평가 :